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리폴리 전투 (문단 편집) == 영향 == [[오스만 제국]]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국의 전투. [[제1차 세계 대전]] 동안 [[시리아]], [[이라크]], [[팔레스타인]], [[트란스요르단]] 등의 해외 영토를 모두 잃어버렸지만 갈리폴리에서 승리함으로서 본토까지 점령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. 결국 오스만 국내는 별다른 피해 없이 온존될 수 있었고, 전후에 벌어진 [[그리스 왕국]]과의 [[튀르키예 독립전쟁|전쟁]]에서 배후지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.[*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스만 제국도 1차 세계 대전 초반에는 그럭저럭 선방한 편이었다. 비단 갈리폴리 전투뿐 아니라, 러시아와 싸운 [[캅카스]] 전선에서는 조금 밀리면서 승패를 주고 받았지만 1916년 중반의 비틀리스 전투에서 무스타파 케말의 승리로 [[러시아 제국군]]의 본토 진격이 저지되었고, 중동 전선에서도 찾아보면 1916년까지는 오스만이 승리한 전투도 꽤 많다.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TVJqRVKmivg| 이 동영상 초반부를 봐도]] 오스만 제국이 [[협상국]]에게 크게 밀리지 않았다.] [[디스커버리 채널]]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전투의 결과를 '''튀르키예의 승리'''라고 분명하게 정의했다. 당연히 전쟁 영웅이 된 케말은 장군으로 진급했으며, 이후로 군에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과 세력이 많아지면서 서서히 권력을 가지게 된다. 그 뒤 [[세브르 조약|패전으로 몰락한]] 오스만 제국의 [[튀르키예 독립전쟁|혁명을 이끌어]] 왕조를 엎어버리고 귀족 정치와 부패를 척결하였다. 그후 새로 탄생한 [[튀르키예 공화국]]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튀르키예의 국부로 지금까지도 칭송받는다. 물론 오스만 제국 황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몰아내는 반역자를 키운 승리였으므로 사실상 [[피로스의 승리]]였지만 말이다. 반대로 [[윈스턴 처칠]]에게는 이 전투에서 보여준 꼴사나운 짓으로 인해 '''[[쿠르드족]]에게 [[최루가스]]를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과 같이''' 정치 인생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암흑기이자 [[흑역사]]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. 처칠의 정적들은 '''"처칠의 오만함이 보기 싫다면 갈리폴리 전투에서 넌 뭐했냐고라고 말해라. 그러면 대꾸도 못한다."'''며 비웃었다고 한다. 실제로 처칠은 [[발작버튼|이 말만 들으면 크게 화를 냈고]], 그래서 친구들도 그의 앞에서 이 전투에 관한 얘기를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. 처칠은 이에 대한 책임을 해군참모총장 [[존 피셔]][* John Arbuthnot Fisher (1841.1.25~1920.7,10). 최종 계급은 해군 원수.] 제독에게 떠넘기고 해임했으나[* 혹은 항의의 표시로 사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.][* [[적반하장|참고로 피셔 제독은 해당 작전을 이악물고 반대했었다.]]]결국 해군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예비역 육군 중령 신분에 따라 소집되어 [[참호전]]에 투입되었다 생환했다. [[됭케르크 철수작전]] 전후의 처칠을 다룬 영화 [[다키스트 아워]]에서도 표현되는데, 정적 [[에드워드 우드|핼리팩스 백작]]이 갈리폴리를 언급하며 처칠을 밀어붙이자 처칠이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건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며 항변하는 모습이 나온다. 갈리폴리 전투에서는 고전적인 상륙작전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났고[* 꼴랑 노젓는 나무배에 수십명이 탑승하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었다.], 이후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소규모 상륙전 경험과 이 전투의 교훈을 토대로 신개념 [[상륙함]]을 건조하는 계기가 되었다. 그러나 정작 개삽질의 주범인 영국은 여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여 27년 후 다시 한 번 크게 [[디에프 상륙작전]]에 패배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영국도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기는 얻었고, 전간기 시절 미 해군 및 미 해병대와의 공동훈련과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상륙전에 상당한 노하우를 쌓게 된다. 약화되어 가는 경제력과 상륙할 곳이 적은 유럽의 지형적 상황 때문에 미국에 비하면 소규모 상륙병단이었지만 그래도 [[영국 해병대|해병대]]를 계속 유지했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 후에는 해병대의 보병부대를 [[코만도(특수부대)|코만도]]화해 특수부대적인 성격을 어느 정도 겸비한 유럽식 소수정예 상륙부대로 개편, 대규모의 [[미합중국 해병대|미국식 해병대]]와는 차별화된 성격의 해병대로 발전시켰다. 그리고 해병대 내에 코만도 여단 외에도 별도의 소규모 특수부대인 [[SBS(특수부대)|SBS]]까지 보유했다. 그리고 미국이 퇴짜를 놓은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LCVP_%28United_States%29|LCVP 차량병력상륙정]]의 전신인 히긴스 보트를 낼름 계약해 나름 잘 운용을 하는 걸 본 미 해군이 다시 사와 LCVP라는 이름을 붙혔다.[* [[http://blog.naver.com/imkcs0425/60166932207]]] 그리고 조선소가 모자란 영국 해군의 주문으로 인해 미 해군이 영향을 받은 상륙함은 [[상륙선거함]]과 [[전차상륙함]](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Landing_Ship,_Tank|#]]),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Landing_craft_tank|전차상륙정]],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Landing_Craft_Infantry|대형보병상륙정]]이 있다.[* [[http://blog.naver.com/imkcs0425/60167805017]]] 이 갈리폴리의 악명(?)은 [[제2차 세계 대전]]에서도 다시 나오는데, [[도데카니사 전투]]에서 [[독일 국방군]]에게 큰 피해를 입으며 영국군이 패주하자 처칠은 또 '''어게인 갈리폴리'''냐며 비난을 받았다. --하필 위치도 갈리폴리에 가깝다-- 처칠을 까는 단어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. 그만큼 실패한 작전. 가타부타 말을 더 안 붙이고 '갈리폴리' 한마디 남기는 식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